1편에서 본 고대·중세의 화폐는 대체로 왕이 만들고 왕이 망가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근대에 들어 두 가지가 새로 생깁니다. 하나는 대륙 밖에서 쏟아져 들어온 은, 다른 하나는 국가가 영원히 갚지 않아도 되는 빚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금융 시스템의 뼈대가 이 시기에 만들어졌습니다.
아메리카 은은 유럽 물가를 얼마나 올렸나
약 150년에 걸쳐 6배, 연 환산 1.2% 올렸습니다.
1545년 오늘날 볼리비아의 포토시에서 거대한 은광이 발견됐습니다. 1560년대 안데스에서 수은 광맥이 확인되면서 아말감법으로 은 정련 효율이 뛰었고, 멕시코 사카테카스·과나후아토와 함께 유럽으로 향하는 은의 양이 폭증했습니다.
연 1.2%. 2026년의 우리 눈에는 물가가 안정적이었다고 말할 수준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럽인에게는 완전히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그 이전 수백 년간 물가는 흉작이 들면 오르고 풍년이면 내리는, 평균으로 돌아오는 숫자였습니다. 가격혁명은 인류가 처음으로 “물가는 한 방향으로 계속 오른다”를 경험한 사건입니다.
은 유입만으로 전부 설명되지는 않습니다. 최근 연구는 같은 시기의 인구 회복과 도시화, 화폐 유통 속도 변화도 함께 작용했다고 봅니다. 이 글은 “은이 물가를 6배 만들었다”가 아니라 “은이 쏟아진 150년 동안 물가가 6배가 됐다”까지만 말합니다.
돈의 양이 늘면 물가가 오른다는 관계를 현대 데이터로 보고 싶으시면 통화량(M2)과 물가(CPI)는 왜 다른 답을 주나를 함께 보시면 좋습니다.
국채와 중앙은행은 어떻게 발명됐나
전쟁 자금을 빌리려다 만들어졌습니다.
1694년 영국은 프랑스와 전쟁 중이었고 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했습니다. 투자자들에게 120만 파운드를 모아 정부에 **연 8%**로 빌려주고, 그 대가로 이 투자자 집단에 은행권 발행 특허를 준다. 1694년 7월 27일 국왕 윌리엄 3세가 ‘잉글랜드 은행 총재와 회사’에 칙허장을 내줍니다.
가장 중요한 대목은 담보입니다. 이 120만 파운드는 금이나 은으로 담보되지 않았습니다. 담보는 톤세(선박세)와 소비세, 즉 아직 걷지 않은 미래의 세금이었습니다. 이 세수에서 연 14만 파운드가 배정돼 10만 파운드는 8% 이자로, 4만 파운드는 종신연금으로 나갔습니다.
| 1694년 영란은행 | 2026년 국채 | |
|---|---|---|
| 빌리는 주체 | 국가(의회) | 국가(정부) |
| 담보 | 톤세·소비세 = 미래 세수 | 조세권 = 미래 세수 |
| 상환 | 이자만 지급, 원금은 계속 굴림 | 만기 도래분은 차환 발행 |
| 발행 근거 | 은행권 발행 특허 | 중앙은행·금융시장 |
그전까지 군주의 빚은 왕 개인의 빚이었습니다. 왕이 죽거나 마음을 바꾸면 떼였기 때문에 이자가 비쌌습니다. 1694년 이후 빚의 주체가 왕에서 국가로 바뀌고, 정해진 세수에서 이자가 자동으로 나가면서 국채는 안전자산이 됐습니다. 그러자 정부는 훨씬 싸게, 훨씬 많이 빌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서 결정적인 습관이 생깁니다. 원금을 갚지 않는 것. 이자만 제때 내면 시장은 만족했고, 만기가 오면 새 국채를 찍어 갚았습니다. 상징적인 숫자가 있습니다. 1834년 시점의 정부 대(對)영란은행 잔액 11,015,100파운드는 그 뒤로 계속 장부에 남아 있다가, 창립 300주년이던 1994년 7월에야 전액 상환됐습니다. 300년짜리 빚입니다.
“국가부채가 왜 안 줄어드나”라는 질문의 답 절반은 여기 있습니다. 국채는 갚기 위해 설계된 상품이 아니라 굴리기 위해 설계된 상품입니다.
지폐로 국가부채를 없애려던 실험은 왜 실패했나
지폐와 주가를 서로의 담보로 묶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시기 프랑스는 루이 14세가 남긴 부채로 파산 직전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존 로가 해법을 제안합니다. ① 은행(1716년 방크 제네랄, 이후 방크 루아얄)을 세워 지폐를 발행하고 ② 미시시피 유역 개발권을 가진 서방회사(미시시피 회사)를 만든 뒤 ③ 국채 보유자들이 국채를 이 회사 주식으로 바꾸게 한다. 국가부채가 주식으로 변신하는 마술입니다.
처음엔 작동했습니다. 은행이 찍은 지폐로 사람들이 주식을 샀고, 오른 주가가 다시 지폐를 더 찍을 근거가 됐습니다.
| 시점 | 미시시피 회사 주가 |
|---|---|
| 1719년 초 | 500리브르 |
| 1719년 말 | 10,000리브르 초과(고점 약 12,500) |
| 1720-09 | 2,000리브르 |
| 1720-12 | 1,000리브르 |
| 1721-09 | 500리브르 |
1720년 5월 21일 로는 주식 가치를 절반으로 낮추는 포고를 냈고, 신뢰가 무너지자 뱅크런이 시작됩니다. 7월 17일 방크 루아얄 앞에서 15명이 압사했습니다. 로는 그해 12월 28일 프랑스를 떠나 9년 뒤 베네치아에서 가난하게 죽습니다.
로의 진단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경제 규모에 비해 정화(금·은)가 부족하니 신용으로 보완하자는 발상은 오늘날 중앙은행이 실제로 하는 일입니다. 틀린 것은 자산 가격을 화폐 발행의 근거로 삼은 설계였습니다. 2008년 주택가격을 담보로 신용이 팽창하다 역방향으로 무너진 구조와 뼈대가 같습니다.
이 사건 이후 프랑스는 100년 넘게 지폐를 불신했고, 영국은 국채와 은행권 체제를 계속 발전시켰습니다. 19세기 금융 패권이 런던에 있었던 이유를 여기서 찾는 시각도 있습니다.
금본위제는 정말 오래된 제도인가
아닙니다. 국제 체제로는 약 40년 작동했습니다.
‘금본위제’라는 말에서 우리는 수천 년의 전통 같은 것을 떠올립니다. 실제 연표는 이렇습니다.
| 연도 | 사건 |
|---|---|
| 1819 | 영국, 금본위 법제화(1821년 태환 재개) |
| 1834 | 미국, 사실상 금본위로 이동 |
| 1871 | 통일 독일, 금본위 채택 |
| 1873 | 미국 주조법(Coinage Act)으로 은화 주조 중단 |
| 1900 | 미국, 금본위법(Gold Standard Act)으로 법제화 |
| 1914 | 1차 세계대전 발발, 각국 태환 중단 |
주요국이 다 함께 금에 묶여 있던 시기는 1870년대부터 1914년까지입니다. 전쟁이 터지자 각국은 예외 없이 태환을 중단했습니다. 돈을 금에 묶어두는 규칙은 국가가 큰돈이 필요해지는 순간 가장 먼저 버려지는 규칙이었습니다. 전간기에 복원을 시도했지만 대공황과 함께 다시 무너졌고, 이후 1944년 브레튼우즈로 형태를 바꿔 되살아났다가 1971년 완전히 끝납니다.
금이 통화량 대비 실제로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금값은 통화량보다 빨리 올랐을까에서 현대 데이터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정리
- 1545년 포토시 은광 이후 유럽 물가는 약 150년간 6배(연 1.2%)가 됐다. 인류가 처음 경험한 지속적 인플레이션이다.
- 1694년 영란은행은 금이 아니라 미래 세수를 담보로 정부에 120만 파운드를 연 8%에 빌려줬다. 중앙은행은 국채 인수 기구로 출발했다.
- 영국 국가부채는 4년 만에 13배가 됐고, 1834년 잔액 1,101만 파운드는 1994년에야 상환됐다. 국채는 갚는 상품이 아니라 굴리는 상품이 됐다.
- 존 로의 지폐·주가 연동 실험은 2년 만에 −96%로 끝났다. 진단은 옳았고 설계가 틀렸다.
- 국제 금본위제는 1870년대~1914년, 약 40년만 작동했다. 전쟁이 나자 모든 나라가 먼저 버린 규칙이었다.
3편은 이미 올라와 있습니다. 1971년 금 창구가 닫힌 뒤 55년 동안 세계 부채가 353조 달러가 되기까지의 이야기는 빚은 왜 줄지 않나 — 금본위제 폐지와 세계부채 353조 달러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