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량은 줄지 않고, 물가는 거의 매년 오릅니다. 그러면 현금을 들고 있는 사람은 가만히 있어도 매년 구매력을 잃습니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질문이 있습니다. 내가 잃은 만큼 누군가는 얻었을 텐데, 그건 누구인가. 이 글은 그 반대편에 있는 금액을 실제 통계로 계산합니다.
물가가 3% 오르면 내 예금에서 얼마가 사라지나
2026-08 소비자물가 상승률 3.09%를 가계가 보유한 현금·예금에 적용하면 1년에 약 83.9조 원의 실질 구매력이 줄어듭니다.
계산의 출발점은 이렇습니다. 2026년 1분기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금융자산 잔액은 6,417.1조 원이고, 이 가운데 현금·예금 비중이 42.3%입니다. 금액으로 약 2,714조 원입니다. 2026-08 주민등록 인구 51,084,159명으로 나누면 1인당 약 164만 원입니다.
이자를 받으니 상쇄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거의 상쇄되지 않았습니다. 예금은행 저축성수신금리로 복리 운용했을 때 최근 10년(2016-08~2026-07) 원금은 1.249배, 같은 기간 소비자물가는 1.255배였습니다. 실질수익률 -0.5%입니다.
사라진 그 돈은 어디로 갔나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동했습니다. 물가가 올라도 명목 부채는 1원도 줄지 않기 때문에, 예금자의 실질 자산이 줄어드는 것과 정확히 같은 비율로 채무자의 실질 부담이 줄어듭니다.
| 구분 | 잔액 | 기준 | 물가 3.09%의 효과 |
|---|---|---|---|
| 가계 현금·예금 | 2,714조 원 | 2026년 1분기 | 실질가치 −83.9조 원 |
| 국가채무(D1) | 1,415.2조 원 | 2026년 전망 | 실질부담 −43.7조 원 |
| 가계신용 | 2,019.8조 원 | 2026년 2분기말 | 실질부담 −62.4조 원 |
이 표의 금액들은 서로 직접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통계의 포괄범위와 기준 시점이 다르고, 채권자·채무자 관계도 가계–정부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금융기관·기업·해외 부문이 중간에 있습니다). 방향과 규모를 보는 계산이지 정산표가 아닙니다.
가장 큰 수혜자는 누구인가
단일 주체로는 정부입니다. 물가 상승은 정부에 세 갈래로 들어옵니다.
첫째, 부채의 실질가치 희석. 2026년 국가채무(D1) 1,415.2조 원에 물가상승률 3.09%를 적용하면 43.7조 원입니다.
둘째, 화폐발행이익. 한국은행은 이자를 물지 않는 현금을 발행해 이자가 붙는 자산을 보유합니다. 2025년 결산 당기순이익은 15조 3,274억 원이었고, 30%인 4조 5,982억 원을 법정적립금으로 쌓은 뒤 10조 7,050억 원을 정부 세입으로 납부했습니다. 법인세 5조 4,375억 원은 별도입니다.
셋째, 명목 세수의 자동 증가. 부가가치세는 가격의 10%이므로 물가가 오르면 과세기반이 같이 커집니다. 2026년 부가가치세 86.6조 원에 3.09%를 적용하면 약 2.7조 원입니다. 소득세는 과세표준 구간이 명목 금액으로 고정돼 있어, 물가만큼 임금이 올라도 실질소득이 그대로인 사람이 더 높은 세율 구간으로 올라갑니다.
앞의 두 항목만 합쳐도 54.4조 원으로, 2026년 국세수입 415.4조 원의 **13.1%**입니다.
이것을 ‘세금’이라고 부를 수 있나 — 여기서 사실과 해석이 갈립니다. 사실은 위의 금액입니다. 해석은 둘로 나뉩니다. 한쪽은 이것을 국회 표결을 거치지 않고 화폐 보유자에게서 걷는 재원이라는 의미로 ‘인플레이션 조세’라 부릅니다. 다른 쪽은 물가목표 2%가 재원 조달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을 피하기 위한 하한 완충이며, 부채 희석은 의도가 아닌 부산물이라고 봅니다. 어느 해석을 택하든 금액은 같습니다.
그러면 가계는 손해만 보는가
아닙니다. 가계는 채권자이면서 동시에 채무자입니다. 현금·예금 2,714조 원에서 가계신용 2,019.8조 원을 빼면 순채권 약 695조 원이고, 여기에 3.09%를 적용하면 순손실은 연 21.5조 원으로 줄어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평균이 아니라 분포입니다. 같은 3.09% 안에서 손익이 갈립니다.
- 예금만 있고 대출이 없는 사람 → 손실 쪽
- 주택담보대출을 지고 실물자산을 보유한 사람 → 이득 쪽
- 임금 인상률이 물가상승률을 넘지 못한 사람 → 손실이 한 번 더
평균적인 가계는 없습니다. 이 글의 숫자는 집계치이고, 각자의 손익은 자신의 현금·예금 잔액과 대출 잔액의 차이로 결정됩니다.
왜 이렇게밖에 할 수 없나
돈이 대출로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2026-05 화폐발행잔액은 217.25조 원으로, 같은 시기 M2 4,213조 원의 **5.2%**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94.8%는 은행이 대출을 실행할 때 생긴 예금입니다. 이 구조에서 통화량을 늘리지 않으려면 사회 전체가 새로 빌리는 금액과 갚는 금액이 같아야 합니다.
물가목표를 0%가 아니라 2%로 두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목표를 0%로 두면 경기가 나빠질 때 실제 물가가 마이너스로 내려가고, 그때는 금리를 0% 밑으로 내리기 어려워 대응 수단이 먼저 소진됩니다. 2%는 그 하한까지의 거리, 즉 완충입니다. 여기에 임금과 가격은 올리기보다 내리기가 훨씬 어렵다는 현실이 더해집니다.
통화량이 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생기나
명목 부채만 남습니다. 한국 M2는 1971-01 이후 666개월 동안 전년동월 대비 감소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실제로 줄었던 구간은 예외적이었고, 그 성격이 분명합니다.
- 미국 M2는 2022-12~2024-02의 15개월 동안 전년동월 대비 마이너스였습니다. 금리를 빠르게 올린 직후였고, 그 구간 안에서 미국 지방은행 파산이 발생했습니다.
- 한국 소비자물가가 전년동월 대비 마이너스였던 달은 1966-01 이후 728개월 중 3개월(2019-08, 2019-09, 2020-05)뿐입니다.
물가가 실제로 내려가면 가계신용 2,019.8조 원과 국가채무 1,415.2조 원은 그대로 있는데 소득과 매출만 줄어듭니다. 실질 부담이 커지고, 부담이 커지면 상환을 위해 지출을 줄이고, 지출이 줄면 물가가 더 내려갑니다. 이것이 통화량 증가를 멈추기 어려운 실질적인 이유입니다. 금본위제는 돈의 총량에 물리적 상한을 둔 제도였고, 그 상한이 왜 유지되지 못했는지는 금본위제 폐지 이후의 부채 구조에서 다뤘습니다.
이 숫자를 어떻게 써야 하나
두 가지 기준을 구분해서 쓰면 됩니다. 생활비 부담을 볼 때는 CPI, 자산이 전체 돈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는 M2입니다. 최근 10년 한국 M2는 1.93배, 소비자물가는 1.26배 늘었습니다.
내 순포지션 계산해 보기 — 과거 돈 환산 계산기에 금액과 기간을 넣으면 CPI·M2 두 기준의 결과를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현금·예금 잔액에서 대출 잔액을 뺀 금액을 넣으면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예측하지 않습니다. 물가가 앞으로 얼마나 오를지, 어떤 자산을 사야 하는지는 다루지 않습니다.
정리
- 물가상승률 3.09%는 가계 현금·예금 2,714조 원의 실질가치를 1년에 83.9조 원(1인당 164만 원) 깎는다.
- 그 반대편에서 국가채무 1,415.2조 원의 실질부담이 43.7조 원 줄고, 한국은행은 2025년 결산에서 정부에 10.7조 원을 납부했다. 합계 54.4조 원은 2026년 국세수입의 13.1%다.
- 가계도 2,019.8조 원의 채무자여서 전부 손실은 아니다. 순채권 695조 원에 대한 연 21.5조 원이 순손실이고, 개인별 손익은 순포지션이 결정한다.
- 화폐발행잔액은 M2의 5.2%뿐이다. 돈은 대출로 만들어지므로 통화량 증가를 멈추면 부채만 남고 실질 부담이 커진다.